새벽부터 시끄러운 공사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에도 5시에서 5시반 쯤부터 인부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알람도 울리기 전 공사가 시작된다. 그래도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유독 심했다. 위에서 판자를 바닥까지 던지는지 쿵, 쿵 하는 소리에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귀에 에어팟을 장시간 꽂고 있었을 때의 그 먹먹한 느낌이었다. 전날도 새벽 느즈막이 잤기에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다. 그래도 쪽잠이라도 청해보려 뒤척여 봤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쉽게 돌아오질 않았다. 결국 시간이 되어 알람이 울렸고, 불쾌한 감각을 떨치려 휴대폰으로 아무 음악이나 틀었다. 맞은편 방에서 방문을 열고 자던 룸메이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결국 공사 소리를 감당하지 못한 난 에어팟을 꼈다. 노이즈 캔슬링이 되며 모든 소리들이 멀어지고 오로지 음악 소리만이 남았다. 블랙핑크의 Love sick girls, 향밀침침신여상의 涼涼, 레드벨벳의 러시안 룰렛이 차례로 나왔다. 곡 세 개가 끝날 때쯤 난 모든 준비를 마쳤고, 집을 나섰다.
회사 근처 역을 빠져나오는 계단에서 어떠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자주 머릿속을 점령하던 그 장면은 역사 창문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니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비 올 때면 늘 바닥에 깔리는 습한 안개. 끝을 알 수 없는 넓고 먼 수평선이다. 그 아래에는 낭떠러지가 있을지, 깊은 바다가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허리 바로 위까지 무성하게 자라 있는 옅은 갈대들은 바람에 힘없이 꺾인다. 바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분다. 그 사이로 여자가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등을 넘어서는 긴 갈색 머리가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린다. 여자는 한 손을 들어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카락으로부터 얼굴을 가린다. 바라보고 있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릴 듯하지만 결국 돌리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여자의 옆얼굴만 문득 문득 확인했을 뿐, 여전히 제대로 된 얼굴은 알 길이 없다. 이 공간에 여자와 나,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듯했지만 그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가슴 아래까지 덮칠 때면, 늘 희뿌옇게 머릿속에 스며들던 환상도 깨어지고 만다. 현실 감각이 되돌아온다.
_2021.06.18 비 오는 날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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